사무엘하 6장 9 - 14절 (개역한글) 9 다윗이 그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 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처음부터 언약궤는 메고 가는 것이었다. 2절을 보자.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하나님의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왔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고 원칙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
사무엘하 6장 4 - 8절 (개역한글)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날뛰는 소로 인해 웃사가 죽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삼만 명을 선별했다. 산 위에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져오려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각종 악기를 사용하여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였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는 소가 끄는 새 수레를 몰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가까운 동네의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가 날뛴 것이다. 거의 다 왔는데 말이다. 웃사
사무엘하 6장 1 - 8절 (개역한글)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 블레셋으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았으며,
(더워드뉴스(THE WORD NEWS) = 하랑이랑)
마리아 늘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나는 항상 그리움을 숨겨야만 했죠 늘 곁에서 듣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무릎 꿇고 그 발 위에 엎드립니다 그대의 놀라운 계획 그대의 희생 조건 없는 그 사랑 안에서 두렵고 떨고 있지만 오늘 이렇게 초라한 나의 모든 것 드립니다 나 이제 알아요 그길 눈먼 사랑으로 우릴 위해 걸어가실 그길 비춰드릴게요 내 삶으로 아름다운 주님만이 내 사랑입니다 (더워드뉴스(THE WORD NEWS) = 유중원 기자)
저와 영부인은 미국의 모든 가정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시기를 빕니다. 크리스천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을 떠올리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약 2000년 전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눅 1:30-32) 그리고 9개월 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베들레헴 마을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저희 크리스천들은 구세주 예수의 탄생으로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알고 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지 2000년이 넘었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여전히 전 세계 수십억 명에게 영감과 은혜를 주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소망과 믿음으로 채워줍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매 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_ 잠언 1장 33절
*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린 고봉(高峯)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김영한 상임대표의 기고문입니다. 김영한 대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대학원 원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0. 보수주의적 개혁주의 신앙 사상: 세대주의적 견해 대신 개혁신학적 창세기 해석 수용 고봉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으로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948년 야간신학교인 대한신학교(현 안양 대학교)를 세워 “헌신 전도자 양성을 지속했다. 장로교단의 분열과정에서 독자 노선을 택하여 더 이상 주류 교단과 목회자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부득히 대신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혼란 가운데 1951년 5월 30일에 열렸던 총회신학교 이사회에서 교수로 결정되었다. 1961년 총회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총신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원용국교수는 “예과 학년 때는 에스겔서 강해였고, 본과 학년때는 소선지서 강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원용국, "김치선 목사와 나", 「신학지평J 13 (2000), 3.). 현재 그의 강의 원고들이 남아 있는데 구약과 관련하여, 구약사 강의안, 예레미아서 강의
*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린 고봉(高峯)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김영한 상임대표의 기고문입니다. 김영한 대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대학원 원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베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
*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린 고봉(高峯)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김영한 상임대표의 기고문입니다. 김영한 대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대학원 원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5. 정통 개혁신학적 성경관 고봉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주장하면서 고평비평을 비판했던 구(舊) 프린스턴학파의 헨리 그린(Henry Green) 교수와 그의 제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오스월드 앨리스(Oswald Allis) 박사의 논거에 근거하여 모세오경에 대한 자유주의의 문서설을 비판하면서 모세 저작권 논제를 구성하고 있다.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주장을 성경의 내적 증거와 비평학자들의 주장들의 문제점들을 통하여 해명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 신화와 비교한 창세기 내용들의 독특성, 그리고 당시 진행되고 있던 고고학적 발굴의 객관적인 자료들을 활용하여 구 프린스턴 학파의 성경 영감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 선교 횃불, 2015.) 고봉은 신학박사 학위논문 서문에서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일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사회복음"(Social Gospe
*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린 고봉(高峯)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김영한 상임대표의 기고문입니다. 김영한 대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대학원 원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
*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린 고봉(高峯)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김영한 상임대표의 기고문입니다. 김영한 대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대학원 원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머리말 고봉(高峯) 김치선(金致善, 1899-1968)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로서의 신학적 업적보다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 창립자라는 영적 유산과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어졌던 그의 목회적 감화력과 민족 복음화운동의 창시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미국 유학하여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신학자로서 바로 현장목회에 투신하여 회개와 복음화를 강조한 목회를 하였고, 그의 목회는 항상 결실이 있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에도 회개가 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회개가 중심된 목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봉은 설교문과 신학의 글이나 강의안을 남겼으나 그의 전공인 구약학에 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 「신명기의 모세저작」(Kim, Chi Syun. 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_ 전도서 12장 13-14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인간은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단 심판이 시작되면 과거의 일을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없어서입니다.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죄에 대한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상과 벌은 분명히 있습니다. 죄의 대가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됨입니다.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에는 전쟁을 겪으며 지옥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반응합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을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아서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이 예수님 보다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천국에 시선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분명히 심판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천당 설명자만 되지 말고 천당에 앉을 자가 되십시오. 지옥 설명자만 되지 말고, 지옥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 손양원 목사 >
(더워드뉴스(THE WORD NEWS) = 하랑이랑 작가)
“ 악이 우리 세상을 어둡게 할 때, 우리에게 빛을 주시옵소서. 절망이 우리 영혼을 마비시킬 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우리를 일으켜 주옵소서. 의심의 마음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일 때, 우리에게 신뢰의 마음을 주옵소서. 이상(理想)이 희미해져갈 때, 우리에게 비전을 주옵소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가 평온을 찾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아멘. When evil darkens our world, give us light. When despair numbs our souls, give us hope. When we stumble and fall, lift us up. When doubts assail us, give us faith. When nothing seems sure, give us trust. When ideals fade, give us vision. When we lose our way, be our guide that we may find serenity in Your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3편 5절 > — 흔히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시작해서 감정과 의지를 병들게 하고, 마침내 육체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영적인 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완전한 백신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라볼 대상이 있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를 돕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The Word News(더워드뉴스) = 김용석 그레이스선교교회 부목사)
"십자가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수치입니다. 그저 나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입니다." <하용조 /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다”> —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독단적이라고 말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개인, 가정, 나라와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가 풀리면 인생의 문제가 풀립니다. 인류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The Word News(더워드뉴스) = 김용석 그레이스선교교회 부목사)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게야. 진지하고도 끈질기게 기쁨을 갈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기쁨을 얻게 되어 있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나라." <C.S 루이스 / '천국과 지옥의 이혼' 중> __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둘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도 하나님 보다 더 많으면 집착입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한 사랑도, 자신의 업적에 대한 사랑도, 인간의 탐욕도, 모두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소원하는 그 무엇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집착하는 것